카테고리 없음

"직업은 짧고 인생은 길다"

운정서실 2023. 3. 4. 18:15

   내가 젊었을 때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흔히 들었다. 멋있는 말이었다. 지금 세상에서는 “직업은 짧고 인생은 길다”는 말을 만들어내야 할 것 같다. 인간의 수명은 자꾸 늘어나는데 그에 비해 사람이 종사할 수 있는 직업 또는 직장의 수명은 갈수록 짧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전 생애에 걸쳐 한 우물을 팔 수 있는 직업이 없지 않으나 다수의 직업, 특히 산업화 이후에 생긴 직업, 조직에 취업해서 얻는 직업들의 수명은 짧다. 직업이라는 생산활동 자체의 변동률도 높고 개인이 직업생활에 정착하는 기간은 더 짧다. 사람 자체를 대체할 듯이 덤벼드는 AI를 포함한 정보화기술들의 대체효과(기계가 사람을 대체하는 효과)는 막대하기 때문에 없어지는 일자리가 쉴 새 없이 뭉텅이로 생겨난다.

   비교적 안정적이라고 인식되어온 직업도 생애의 일부만을 커버할 수 있을 뿐이다. 직장에서 운 좋게 연령정년까지 채운다 해도 일한 기간보다 더 많은 여생을 무얼 해서 먹고 살지 막막할 수 있다. 정부나 민간의 대규모조직에서 연령정년제도의 보호를 받고 있는 직장인들도 정년 전에 조기 퇴직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민간부문에서 조기퇴직 경향이 두드러진다. 승진한 사람의 동기나 선배들은 자진해서 퇴직하는 용퇴제도가 사실상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직장도 있다. 주기적으로 불어 닥치는 세대교체 바람이나 일제숙정의 바람은 많은 직장인들의 신분보장을 흔들어놓는다. 성과주의적 인사원칙의 확산도 신분안정을 교란할 수 있다.

   자영업, 자유업으로 불리는 직업영역에서도 간단없는 기술변화·사조변화·시장변화 때문에 재적응의 변신을 자주 해야 한다. 경력이 단절되는 일도 잦아졌다. 지적 창조활동이라고 하는 직업영역에서도 뒤처지지 않으려면 재학습․재적응의 길을 숨 가쁘게 달려야 한다. 재적응은 새로운 직업을 구하는 일만큼 힘들 수도 있다.

   한 우물을 파는 직업인으로 인식되어온 대학교수의 생애는 장차 어떻게 변해갈까. 오늘날 대학의 급속한 변모를 보면 젊은 교수들이 어떻게 적응해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전통적으로 교수라는 직업은 안정적으로 오래 하는 직업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재직기간이 길고 퇴직 후에도 학자로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교수가 정년퇴직하면 직장에서는 떠나지만 학자라는 직업은 그대로 남는다는 말을 해왔다. 대학에서 맞는 정년퇴직이 학자의 경력을 단절시키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도 차츰 그 적실성(適實性)을 보장할 수 없게 되어가는 것 같다. 재직 중부터 다른 직업에 눈길을 돌리는 교수들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교수직에서 정년퇴직하고 제2 제3의 직업을 새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정년퇴직과 함께 학자라는 직업도 마무리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학자라는 직업이 생애의 직업이라는 의미도 퇴색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연령정년에 이르기까지 교수로 30여 년간 근무하고 60대에 퇴직한 후 전업하거나 생산적인 학문 활동을 멈추고 120세까지 산다면 교수라는 직업도 생애에 걸친 안정적 직업이라고 할 수 없다. 교수의 종류가 늘어나면서 교수직의 안정성과 생애직업성은 한결 더 약화되어가고 있다.

    교수의 종류가 엄청나게 늘어나서 정신이 없다. 그냥 교수가 아니라 교수 직함 앞에 무슨 수식어가 붙은 교수가 많아서 모두 기억하기조차 어렵다. 객원교수, 특임교수, 초빙교수, 겸임교수, 석좌교수, 명예교수, 외래교수, 임상교수, 기금교수, 계약교수, 연구교수, 강의교수, 예우교수 등등을 나는 ‘별칭교수(別稱敎授)’라고 부른다. 전통적인 교수 이외에 별칭교수들이 앞으로도 자꾸 새로 생겨날 것 같다.

   명예교수는 오래 근무하다가 퇴직하는 교수에게 달아주는 직함이니 일반사람들은 그저 전직교수를 그리 부르나보다 여길 것이다. 대학이나 교수나 별 부담 없는 명예교수직함은 종신제다. 그러나 명예교수가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데 제약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명예교수 직함이 반드시 학자생활의 연속성을 보장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석좌교수는 그저 보통의 교수보다 높은 교수이겠지 여기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교수라고 부를 필요가 있는가 싶다. 교수보다 높은 교수가 있다는 말이 불편하다. 석좌교수 자리는 흔히 임시적이다. 석좌교수라는 직함의 매력이 시들해지면 사람들은 그 위 계층의, 더 높은 직함을 또 만들어내겠지. VIP라는 말이 흔해지자 VVIP가 나왔고, VVVIP도 본 듯하다.

   다른 별칭교수들의 지위가 어떤 것인지, 무엇을 하는 자리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른 직역에 있다가 퇴직한 사람들이 새 직장을 얻을 때까지 재취업을 돕기 위해 임시로 달아주는 별칭교수직함도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그것은 뜨내기 직함이다. 아직까지는 교수라는 직함이 괜찮은 사회적 평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대학과 관련을 맺는 직업인들은 모두 교수라고 불리기를 원해서 그리 된 듯한데 혼란스럽다. 앞으로 교수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 교수라는 말을 따로 해야 하지 않을까.

   장차 계약직으로, 임시직으로 자리를 얻은 별칭교수들이 많이 늘어나면 교수직도 임시적이라는 이미지가 짙어질 터이다. 오래 된 정규교수보다 별칭교수들의 수가 더 많아질 날이 머지않은 것으로 보인다. 교육당국에서는 대학의 비정규직 교수의 정원을 늘려가고 있다고 한다. 진작에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이라는 단체가 구성되어 활동해온 것을 보면 비정규직 교수의 규모가 이미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예전 세상이 ‘저서 없는 독자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지금 세상은 ‘독자 없는 저서의 시대’라고 말한다. 여기서 ‘없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전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드물고, 부족하다는, 필요한 만큼 있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저서 없는 독자의 시대에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생을 위한 교재 등 읽을거리가 아예 없거나 태부족이었다. 학생들에게는 책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사람들이 책을 소중히 여겼다. 많은 교수들이 책을 쓰는 저술활동에서 직업의 보람을 찾았다. 그러나 지금은 독자 없는 저서의 시대이다. 책이 잘 팔리지 않는다. 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도 많이 희미해졌다. 정보획득을 학자들의 저서가 아니라 문제집 장사들이 만들어내는 수험준비서나 인터넷 검색에 의존하는 경향이 현저해졌다. 학자들의 저서는 첨단화된 복제․복사기술 때문에 본래적 가치를 유지하기 어렵다. 원저자의 허탈한 심정을 달랠 길이 없다. 정보기술의 대체효과에 대해 앞에서 언급했거니와 교수생활도 거기에 무관치 않다. AI(인공지능)가 사람 대신 자동차 운전을 해주기도 하고 번역뿐만 아니라 시도 쓰고 소설도 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저서집필을 놓고 교수와 AI가 경쟁할 날이 목전에 닥친 것도 같다. 바둑에서는 인간이 AI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 이미 판명되었다.

   교수들이 저작활동영역에서 점차 밀려난다면 교수들은 저작활동 말고 무엇에서 낙을 찾아야 할 것인가. 스승이 정보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던 시절은 아득한 예날 이야기가 되었다. 교수와 제자의 생애에 걸친 은정관계도 드물어질 수밖에 없다. 문하생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사람도 차츰 사라지겠지. 저술활동이 학자생애의 연속성 혹은 지속성을 보장해주는 중요수단이고 통로라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이 저서집필에 정을 붙이기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지면 학자생애의 계속성도 함께 위협받을 수 있다.

   앞으로 대학은 얼마나 많고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될지 모른다. 그 안에 둥지를 틀고 있는 교수들은 또 얼마나 큰 단절적 변화를 겪어야 할지 모른다. 이야기가 잠깐 옆길로 샌 느낌이다. 다시 사회관계의 잠정화 추세로 돌아가 보자.

   사회가 발전할수록 직업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엮어나가는 모든 관계들이 단기화되어 간다. 인간의 사회생활은 점점 더 단기화․유동화되고 잠정화되어 간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재적응‧재학습의 요구에 쫓기게 된다. 사람들과의 정서적 유대가 자주 단절되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삶이 뜨내기, 부평초같이 되어간다. 오랜 인간인연이나 인정거래는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소외와 고독을 호소한다. 외톨이가 늘어난다. 부적응을 일으키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보통사람들의 삶은 팍팍해지고 각박해진다.

   그런 사회를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까닭은 그 이득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없어 굶는 문제를 해결한 산업화는 조직혁명과 도시화를 동반하였다. 대부분의 인구가 조직에 흡수된다. 사람들이 조직에 들어가 일하거나 조직과 직·간접으로 거래한다. 조직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생은 생각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인구가 도시에 살게 된다. 국가들의 경계는 흐려지고 세계는 국가들의 세계가 아니라 도시들의 세계로 재편되어 가리라는 예언은 오래전에 나왔다. 이와 같은 조직사회화·도시화에 부평초 같은 뜨내기 인생의 원죄가 있다. 뜨내기 인간살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인간이 이끌고 있는 발전의 부작용 내지 후유증이다. 그 업보다.

   예전 세상에는 고향이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었고 타향살이니, 부평초 같은 인생이니, 뜨내기니 하는 형편은 예외적인 것이었다. 특별한 것이었다. 타향살이나 부평초 같은 인생을 제목으로 단 슬픈 곡조의 유행가들은 뭇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대도시의 아파트에서 자라고 여기저기 이사 다니면서 케이팝에 광란하는 젊은이들에게 옛날의 타향살이 노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전국이 한나절 생활권인 지금은 고향이니 타향살이니 하는 말이 누구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지 않는다. 예컨대 서울 태생들이 누가 얼마나 고향에 대한 애착을 노래하겠는가. 지방자치의 기초가 고향을 지키려는 애향심에 있다고 하지만 다 흘러간 이야기이다.

   앞으로 발전되어가는 사회의 편익을 누리면서 병들지 않고 살려면 인간이 엮어내는 모든 관계들의 잠정화에 적응하고 행복한 부평초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만 단타성관계(單打性關係)만 늘어나고 오래 지속되는 관계가 없어져가는 세상에 적응하는 일이 쉽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노인들의 경우에는 특히 더 어렵다. 적응이 안 되면 체념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