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이 1945년 해방 후 정국과 닮았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래서일까. 해방 후 1950년대까지 많이 듣던 변절, 반동분자, 부역자 등의 언어가 근래 자주 쓰인다. 일제강점기, 해방 후의 혼란, 한국전쟁을 경험했던 나는 반동분자니 부역자니 하는 말이 무섭다. 섬뜩하다. 사상이니 주의(主義)니 하는 관념에 깊이 중독되었을 때, 또는 중독이 강요되었을 때 쓰인 말들이다. 나는 사상이니 주의니 하는 것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무서운 말이라는 것도 체험했다.
옳고 그름, 진리, 정의 등을 논하는 사람들은 그 절대성을 주장하기도 하고 상대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만고불변의 절대적 진리, 절대적 정의도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옳고 그름이 상대적인 경우가 더 많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로 다른 수많은 정의들이 있을 수 있다. 같은 사람이더라도 나이 들어가면서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일반적인 경향이다. 가진 게 많은 노인이 가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던 젊은 시절에 믿었던 급진적 사상을 변함없이 지키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동지들 또는 그 후배들은 생각이 달라진 노인을 향해 변절자라 욕하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에서조차도 의견이 갈려 분파가 생기는 걸 보면 절대진리, 절대정의를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다. 정치사상 쪽으로 넘어가면 그 상대성과 편파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역사적으로 부침했던 정치사상이라는 것들은 거의 모두 실천의 현장에서 큰 폐단을 남겼다. 인류가 개발한 최선의 정치이념이라고 하는 민주주의도 방종, 다수의 횡포, 포퓰리즘 때문에 망하게 생겼다.
그런데 사람들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정의에 깊이 빠지면 그걸 절대적이라고 믿거나 적어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런 믿음에 이해관계와 감정적 집착까지 얹히면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극악한 적대행동을 한다. 반성할 여력이 없다.
지금 사람들은 반성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적대적 진영으로 갈려 싸우고 있다. 서로 다른 정의로 무장한 반대진영들끼리는 불공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적대감정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사람들은 이걸 우려한다. 각 진영의 골수파들일수록, 적대행동에 앞장서는 전사들일수록 국민적 진영대립을 걱정하는 소리를 더 많이 한다. 참 아이러니이다. 진영마다 반대진영의 섬멸 또는 투항을 진영대결 해소책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진영대립주체들이 진영대립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이러니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진영싸움을 말릴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말린다고 싸움을 멈출 리도 없다.
시간과 국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 반세기 정도의 시간동안 진영싸움을 해볼 만큼 해보고 지칠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그때 가서 또 다른 원인 때문에 또 다른 형태의 진영대립이 다시 나타난다면 그건 인간본성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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