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적 과도기를 겪고 있는 세상에서 지나친 일들이 속출하고 있다. 무엇이든 과유불급이다. 모자라면 아쉽지만 지나친 행동은 폐단을 빚는다. 근래 공평성의 과잉적 추구를 보면서 과유불급을 생각한다. 사회적 공평성을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추구하는 공평성추구운동권의 과잉경쟁이 문제를 악화시키는 중요한 동인인 것 같다. 여러 가지 차별의 혜택을 누려온 사람들일수록 자기에게 불리한 차별에 대해서는 극렬하고 지나친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공평성 과잉 추구를 부추기는 한 요인이다.
공평성과잉추구자들 가운데는 이른바 '내로남불'이라는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불공평의, 차별의 효과로 혜택을 누려온 사람들이 남이 누리는 차별적 혜택에 대해서는 더 과격하게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젊어서 어른들을 잘 공경했던 사람들은 늙어서 젊은이들의 버릇없음을 관용하거나 그에 대해 입을 닫는다. 반면 젊어서 어른들에게 버릇없이 굴었던 사람들은 늙어서 젊은이들이 자기에게 버릇없이 구는 것을 못 견디고 유별나게 비난한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피우는 담배연기를 아주 싫어한다. 애주가들은 자기가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 다른 사람이 술 취한 것은 보기 싫어한다. 욕을 잘하는 사람들은 남이 자기에게 하는 욕설에 대해서 과잉반응을 일으킨다. 그런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장관 후보자 등 이 땅의 불공평을 섬멸하겠다고 나선 사람들 중 다수는 부당한 방법으로 불공평한 특혜를 누렸거나 이를 추구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다. 불공평이 불공평을 타도하려 덤비는 것은 역설적이다. 불공평한 특혜의 맛을 본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다른 사람이 누리는 보다 큰 특혜를 더 극렬하게 질시할 수도 있다. 보다 큰 불공평을 차지하려는 불공평 간의 대결도 만만치 않으리라.
공평성이란 원래 사람들이 각자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게 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기여한 바에 부합하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원리이다. 공평성은 배분적 정의와 같은 말이다. 이렇게 규정되는 공평성도 인간생활에서 완벽하게 실현되기는 어렵다. 완벽한 공평성을 국가권력으로 강제하려다가는 심각한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공평성 추구가 경쟁적으로 과열되면 공평성의 의미 자체가 왜곡되기도 한다. 공평성을 모든 사람이 똑같아야 한다든가 동일한 몫을 차지해야 한다는 규범으로까지 몰고 가는 일들이 벌어진다.
남녀가 평등해야 하지만 남녀가 완전히 동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여성주의 운동가나 그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나 남녀평등의 수준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음을 우려한다. 남녀가 완벽하게 같아져야 만족할 것인가? 여성단체에서 군 복무 가산점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면 남자들은 여자들에게도 군 복무를 의무화하자고 나선다. 이러다가는 왜 여자만 임신 · 출산의 책임을 지느냐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남녀가 교대로 임신하자는 말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공평성 구현을 부르짖는 경쟁이 과열되면서 실로 이상한 말들도 많이 나온다.
공평성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다소간의 불공평은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할 인생의 일부인지 모른다. 자고로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는 말을 해 왔다. 남편이 번 돈을 아내와 자녀가 쓴다면 과연 불공평한 것인가. 그리 못하게 해야 하는가. 부잣집 자녀가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것을 절대적으로 봉쇄해야 공평한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나 못하는 학생이나 교육기회를 꼭 같이 만들어야 공평한가. 모든 사람이 꼭 같은 대학에 가야 공평한가.
근래 '부모 찬스'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이것은 부모 덕이라는 말이다. 부모의 배경으로, 부모의 도움으로 누리는 혜택이다. 부모 찬스를 중대범죄 취급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모 찬스를 악에 받힌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부모 찬스가 불법적이라든가 사회상규에 비추어 비윤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경우 그에 대한 비난은 마땅하다. 그러나 자유주의체제,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부모덕을 말살해야 한다고 보는 견해에는 문제가 있다. 거부(巨富)의 자식이나 걸인의 자식이나 사회적 대우가 완벽하게 똑같을 수는 없다. 완벽하게 똑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을 요구하는 것이다. 정당한 과정을 거쳐 성공한 부모의 덕으로 자식들이 누리는 모든 혜택을 죄악시하는 풍조는 위험하다.
정치인들의 포퓰리즘 때문에 진 나랏빚을 그 혜택을 누린 바 없는 후속세대가 갚아야 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봉쇄할 방법이 있는가. 차별 철폐를 위한 역차별의 문제는 어찌할 것인가. 지난 세대가 여성을 차별한 것을 보상하기 위해 현재의 남성들에게 불이익을 준다면 공평한가. 예전에 남자들이 여자를 차별한 죄를 여자를 차별한 적이 없는 지금의 젊은이들이 짊어지는 것이 과연 공평한가. 불공평한들 역차별을 피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침략국가들이 과거에 저지른 죄과를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후예들이 책임져야 한다면 그것이 불공평한 것인가. 불공평해도 감내할 수밖에 없다.
평등의 원리주의적 신봉자들이 불공평의 절대적 해체를 추구하면서 무리한 일들을 벌이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더 큰 화근을 만들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위정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기울이는 주의만큼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느냐"에도 같은 무게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인생의 흐리멍덩한 영역을 완전히 없앨 수 있을 만큼 인간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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