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정치와 행정을 관찰하는 연구인들에게 정치의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연구주제를 제안한다. 눈 가리고 아웅은 속과 겉이 다른 형식주의, 고식지계(姑息之計), 조삼모사(朝三暮四), 양두구육(羊頭狗肉), 꼼수, 속임수 등등의 의미를 고루 지닌 말이다. 정치판의 눈 가리고 아웅은 아득히 오래된 현상이다. 그래서 눈 가리고 아웅이 정치의 본질인지 일탈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요즈음의 정치판에서는 눈 가리고 아웅이 더 늘어나고, 더 교묘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몇 가지 따가운 예를 생각해 본다.
한동안 검찰권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이 세인의 관심을 끄는 이슈가 되었다. 그에 관한 위정자(爲政者)들의 발언은 대개 눈 가리고 아웅이다. 검찰 독립을 특별히 강조하는 말은 집권자들에게 고분고분하라는 뜻이거나 내편을 들어달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집권세력의 표리부동은 검찰개혁이라는 말을 역겨운 단어로 변질시켰다.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거에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추진하면서 한 말들도 말짱 눈 가리고 아웅이 되었다. 집값 상승을 막겠다는 정책이 나올 때마다 집값이 오히려 상승하는 것도 정치의 눈 가리고 아웅이 뒤에 숨어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살만하다. 교육기회의 형평성을 높이고 흙수저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추진한다는 교육개혁·입시개혁이 되풀이될수록 점점 더 금수저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빚는 것도 눈 가리고 아웅 때문 아닌가. 코로나 19에 전시와 같이 대응하겠다고 선언들은 부지런히 했지만 마스크 대란 하나를 제때 해소하지 못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전시에 준하는 대응이란 눈 가리고 아웅 아니었는가. 선거철마다 공천을 받지 못해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들은 대개 당선되면 복당 하겠다는 말을 선거전략으로 쓴다. 그들의 이전 소속 정당에서는 탈당자들이 당선되더라도 복당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극단적인 표현으로 그걸 강조하지만 그런 말은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지켜지지 않을 것을 모두가 알면서도 복당 불허의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딱하지만 이것이 눈 가리고 아웅인 것만은 부인할 수없다.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이 다른 당의 인기에 편승해보려는 여러 작태는 신종 눈 가리고 아웅이라 할까.
또 다른, 코믹 쇼 같은 , 눈 가리고 아웅의 예 하나만 더 보기로 한다. 선거철이 되면 정당마다 이른바 공천관리위원회(공관위) 같은 걸 만드는 것이 근래 정치권의 풍습처럼 되었다. 그걸 만드는 명분은 훌륭하다. 후보 공천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한다는 것이 주된 명분이다. 공관 위원장을 초빙할 때는 그에게 공천 결정의 전권을 부여한다고 선언한다. 그런 말을 하는 까닭은 공천의 공정성을 대외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공천관리라는 험난한 과제를 맡을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한 유인도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전권 부여라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파열음이 나고 공관 위원장이 중간에 쫓겨나는 예가 많다. 공관위가 당을 주도하는 세력의 의중을 잘 헤아려 그에 맞게 공천작업을 하고, 그 결과에 대한 비난과 공격은 대신 막아주었다면 그런 소동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공관위를 만들 때의 본심은 총알받이, 욕받이로 일해줄 기구를 생각했던 것 아니었는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터이다. 바지사장으로 일해주기를 기대하고 앉혀놓은 공관 위원장이 소유주처럼 행동을 하다가 봉변을 당하는 거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판의 눈 가리고 아웅은 도처에 널려 있다. 그 예를 어찌 매거(枚擧)할 수 있으랴. 광화문으로 잡무실을 옮기고 시위군중과 늘 대면해 국정을 의논하겠다던 대통령의 선거공약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시위군중친화적인 발언을 가장 많이 했던 대통령이 어떤 역대 대통령들보다 광화문 집회의 원천봉쇄에 더 주력하는 것을 볻 때, 언론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목메어 부르짖던 '민주투사'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언론통제에 앞장서고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명예훼손으로 모조리 고소하는 일에 열을 올릴 때 자가당착을 보고 눈 가리고 아웅을 본다. 전 정권의 비리를 고발해 몰락시킨 사람들이 그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면 전 정권에서도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로 받아쳐 자기의 허물에 대한 공격을 무력화시키려 할 때 눈 가리고 아웅을 보고 인간 본성의 부조리를 본다. 법집행에 임하는 사법기관들이 정치판과 얽힌 사건에 대한 판단을 하면서 구부러진 논리를 펼 때도 눈 가리고 아웅을 본다.
눈 가리고 아웅은 정치의, 특히 민주정치의 피치 못할 수단인가. 조삼모사라고 해야 할 포퓰리즘으로 지탱되는 민주정치는 과연 우민정치(愚民政治)인가. 지나 놓고 보니 눈 가리고 아웅을 잘하는 정치인들, 정치세력들을 유권자들이 선호하고 선택해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눈 가리고 아웅에 능한 정치인들은 유능하고 추진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들에게 정치 9단이라는 칭호를 붙여주기도 한다. 눈 가리고 아웅에 서투르거나 눈 가리고 아웅의 전술대결에서 밀리기만 하는 정치인은 무능하다는 낙인이 찍히는 경우가 많다. 정치인들의 눈 가리고 아웅을 욕하던 사람들도 막상 투표장에 들어가면 눈 가리고 아웅에 능한 사람을 선택하는 게 아닌가 의심해본다. 흉보면서 닮는다더니, 유권자들은 눈 가리고 아웅을 욕하면서도 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기 목적 달성의 효용성을 좋아하는 것 같다. 정치판에서 횡행하는 눈 가리고 아웅의 제조원(製造元)은 결국 국민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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