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비평

생사람 잡는 언어들: 모호, 그리고 불통

운정서실 2024. 4. 18. 11:27

   정치적 논쟁에서 뒤집어씌우기 화법으로 상대방을 마구 공격하려 할 때 쉽게, 그리고 흔히 쓰는 도구가 "모호하다"는 말과 "불통이다"는 말이다. 모호나 불통을 몰염치하게 남용하면 생사람 잡는다는 말을 듣게 된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벽하게 명료한 말과 글을 구사하기는 어렵다. 이런 약점을 노려 아무나 모호하다고 비판하는 버릇을 들인 사람들이 있다. 정적의 정책 · 계획 발표나 질의에 대한 답변에 대해 잘 모르거나 딱히 흠잡을 데를 찾지 못하면 모호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면 그저 무난한 논평이라고 생각들 한다. 그러나 수준의 문제가 있다. 인간능력의 한계 때문에 불가피한 모호성이나 사회상규에 비춰 문제 되지 않는 사소한 모호성까지도 약점으로 잡아 비판하는 것은 몰염치한 행동이다.

 

   사람은 유기체로서, 공동생활하는 개방체제로서 타인과 교호작용하고 정보를 주고 받는다.  사람은 투입정보를 받아 선별하고 처리해서 그에 대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 산출과 환류를 내보낸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수용하고 그에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지만, 그러기만 해서도 살아남을 수는 없다. 투입정보를 선별해 걸러내고 투입정보의 요구를 때로는 거부하기도 해야 한다.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개체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거부행동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는 본원적으로 불통의 요소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약점을 노려 미운 사람들은 마구잡이로 불통이라 비난하고 보는 정치논객들이 많다. 그건 불통이라는 용어의 남용이다. 더 큰 문제도 숨어 있다. 불통이라는 공격을 일삼는 사람들의 속내를 보면 자기 말에 따르지 않는 것, 자기 지시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을 불통이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이 내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모두 불통이라고 욕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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