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비평

과도기의 희생자들

운정서실 2021. 6. 13. 14:05

   나는 영국 왕실의 사진을 보면서 여왕보다 왕세자가 더 늙어 보인다고 더러 중얼거린다. 다소 과장된 말이지만 장수하고 오래 재위하는 여왕 밑에서 늙어가도록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왕세자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  여왕은 어리다고 할 정도로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그 아들은 많이 늙어 왕이 되거나 아니면 왕이 될 기회를 영영 놓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국 왕실을 보면서 그와는 직결되지 않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생겨나는 희생세대(犧牲世代)를 연상하게 된다. 역사의 과도기에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희생을 겪게 되는 세대가 있다. 그런 희생은 불가피하며 운명적이다.

   부모봉양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던 지금의 고령자들은 자녀들의 봉양을 받기 어렵다. 부모봉양의 풍습이 없어지는 과도기에 지금의 고령자들이 희생을 치르는 것이다. 봉양은 했으되 봉양은 받지 못하는 과도기의 한 세대가 있어야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가족문화가 정착될 수 있다.

   미투행동(me too movement)으로 된서리를 맞은 문화지체자들이 많다. 강제추행이라는 단어는 법률에만 있었고 성추행이니 성희롱이니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으며, 직장의 회식자리에서는 음담패설이 필수였고, 유흥업소에서는 구애 없이 성적 쾌감을 즐겼고, 방종적 여성편력은 낭만적 무용담으로 포장될 수도 있었고,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갈 나무 없다"는 신조를 가지고 여성을 오래 집적거리는 행동이 남자답다고 여겨졌던 '좋았던 시대'에 젊은 날을 보냈던 사내들이 옛날의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저지른 행동 때문에 패가망신의 화를 당하는 일들이 잦았다. 좋았던 시절에 고관대작을 역임했던 노인이 골프장에서 '돈 주고 산' 캐디의 엉덩이 좀 만졌다고 징역형을 선고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지금의 젊은이들 가운데도 성적 방종시대의 작태를 답습하려다가 신세를 망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모두 시대변화를 읽지 못한 과도기의 실패자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자가용이라는 자동차의 대중화가 시작되던 초창기에는 음주운전이라는 말, 음주운전이 처벌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이른바 '드라이브'의 즐거움, 그 낭만을 누리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머지않아 음주운전단속이 점점 더 올가미를 조이게 되었고 급기야 음주운전 사고자를 무겁게 처벌하는 법률까지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아직도 음주운전을 되풀이해 신세를 망치는 자들, 음주운전으로 인명사고를 내 중죄인으로 구속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달라진 줄 모르고 정신을 못 차려 음주운전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은 음주운전 풍조가 억제되어가는 과정의 희생자들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젊었던 시절에 대중매체에서 부동산투기라는 말을 보거나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런 말이 매스컴에 보도되었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으나 나는 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부동산투기가 정책적·사회적으로 중대 이슈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부동산투기라고 부르는 것이 예전에 왜 없었겠는가. 우리 국가경제의 성장과 부의 축적에 기반을 제공한 것들 가운데 부동산투기가 으뜸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들도 돈 모으면 땅 사고 건물 사서 쌓아두지 않았던가. 신흥부자들 또는 졸부들이란 대부분 땅이나 집을 잘 샀던 사람들 아닌가. 땅값, 집값이 얼마나 겁 없이, 빠르게 폭등해 왔는가를 생각해보라. 잘 나간다는 동내의 천문학적이고 전혀 비현실적인 집값을 생각해보라. 이건 위험천만한 현상이다.

   지난날 당연시하거나 적어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부동산거래가 이제 부동산투기로 규정되고 단죄되는 세상이 되었다. 지난날의 관행이 처벌대상으로 된 것이다. 과거의 관행을 믿고 부동산을 산 사람들은 어느 지역이 개발될 거라는 정보를 미리 알고 땅을 샀다고 해서 중죄로 다스려지는 것을 억울해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기준에 따라 그들이 처벌받는 희생을 치러야 부동산거래질서가 달라질 수 있다. 근래 법망에 걸려들어 곤욕을 치르는 다수의 부동산투기꾼들도 과도기의 희생자들이라 할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전에는 연장자, 선임순위자가 존중받았다. 나이는 사회적 교호작용에서 매우 중요한 고려요인이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 제국에서는 장유유서라는 윤리규범이 특히 강한 힘을 지녔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촉진되면서 나이보다 실적이 우선되는 풍조가 힘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급속해지면서 나이 든 사람들이 시대부적응자로 몰리는 풍조도 생겼다. 걸핏하면 나이 많은 사람 물러나라는 말들을 한다. 요즈음 세대교체라는 말은 다반사로 되어있다. 일상 쓰는 말이 되었다는 뜻이다. 사람의 물갈이라는 말도 비슷한 빈도로 쓰인다. 정치판에서도 나이 든 사람들이 물러나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모난, 이를테면 버릇없는 논객들은 노인들이 공직선거에서 투표하지 말아야 나라가 잘 될 것이라는 투의 말을 해서 논란을 빚기도 한다. 나이 든 사람들, 경우에 따라서는 선배들을 싸잡아 '꼰대'라는 비속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사람을 폄훼하는 말로 '보수꼴통'이라는 비속어를 쓰기도 하는데 그 대상은 대개 나이 많은 사람들이다.

   근래 세대교체의 열풍은 주기적으로 부는데, 그 바람에 부딛친 연장자들은 자리에서 물러나는 불운을 맞는다. 그들이 물러나야 세대교체라는 변동이 정착될 수 있다. 장유유서의 질서 속에서 층층시하의 연장자, 선배들을 모시다가 겨우 선배의 자리에 오르려던 사람들이 세대교체 바람에 밀려 물러난다면 그들은 선배를 모시기만 하고 후배들의 모심은 받아보지 못하는 희생세대가 되는 것이다. 세대교체란 한 세대의 희생 위에 실현된다. 요사이 정치판에서는 30대의 젊은 사람이 제1야당의 당수가 된 이야기로 왁자지껄하다. 정치판에서는 그것을 세대교체의 강풍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그 바람 때문에  많은 선배들이 뜻을 펼치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다면 그들은 세대교체 바람의 희생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도 세대교체가 일어나는 과도기의 희생자들이다.

   우리나라는 비극적인 대통령들을 꾸준히 생산해냈다. 그 이야기를 여기서 빼놓을 수 없다. 민중혁명으로 축출된 대통령도 있고, 살해되거나 자살한 대통령도 있고, 사형선고나 무기징역선고를 받았던 대통령들도 있고, 탄핵으로 물러나 징역을 산 대통령도 있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개인적 비리 때문에 퇴임 후 징역을 살게 된 대통령도 있다. 비극의 유형도 참 가지가지이다. 그들에게 비극을 안겨준 이유도 여러 가지일 것이다. 개인적 결함도 있었을 터이고 시대의 요청을 잘못 읽은 탓도 있을 것이다. 연속적인 과도기의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지난날의 대통령들을 역할모형(role model)으로 삼거나 지난날의 통치관행을 답습하다가 봉변을 자초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대통령들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과거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해 화를 당하는 과도기의 부적응 문제에 주목한다.

   여러 해 구속상태에 있는 전직 대통령은 개발독재시대, 유신시대에 청와대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 뒤를 이은 군사정부의 행태도 익히 보았을 것이다. 독재정권에서 대통령이 기업인들의 팔을 비틀거나 옆구리를 찔러 천문학적 액수의 비자금 또는 통치자금을 뜯어내는 것도 잘 보았을 것이다. 그가 구경한 통치행태는 그의 잠재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과거의 기준, 관행에 견주었을 때 자기가 한 통치행위는 매우 정당하고 합법적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례에 비추었을 때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라 하는 것들은 그야말로 '약과'여서 거론의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돈 많은 기업인에게 부탁해 측근의 한 여인에게 말 몇 필 사주도록 한 일, 정보기관의 판공비 일부를 상급기관에서 가져다 집행한 일 등이 중죄가 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많은 인명살상을 저지른 대통령, 사형선고나 무기징역선고를 받았던 대통령을 포함해 사법적 단죄를 받았던 어떤 대통령보다 더 긴 옥살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적·법적 환경의 변화에 대한 그의 인식과 그를 단죄한 사람들의 인식 사이에서 접점을 찾기는 어렵다. 

   나는 여기서 통치행위에 대한 사법적 심사라는 측면에 관련하여 대통령들의 봉변 또는 비극을 검토해보려 한다. 여러 대통령들이 점점 조여드는 사법심사의 변화를 예견하지 못해 문제에 봉착하는 과도기의 희생자들이었다는 평가를 할 수도 있다. 통치행위는 고도의 정치행위로서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이론과 실제의 관행이 지배하던 시대가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오랜 기간 대통령의 행위를 놓고 그 합법·불법을 따지는 일은 드물었다. 따져보았자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대통령의 통치행위도 사법심사의 대상이지만 사법권이 이를 자제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던 시대도 있었다. 그 뒤에 통치행위도 사법심사의 대상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는 시대가 열렸으며 실제로도 사법심사는 점점 더 엄격해져 왔다. 대통령은 사법심사의 위협 때문에 불안에 떨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 기류는 정치권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국회의원들을 사법기관에서 잡아가는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정권력이 입법과 사법도 장악하고 국정을 주도하던 행정국가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대통령들은 몰락해 영어((囹圄)의 몸이 되거나 사법권력의 자제 또는 자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대통령의 통치행위도 사법심사의 대상이 '된다'고 단언하는 시대에 사법권력의 자제를 애타게 호소하는 모습을 실제로 본다. 대통령과 그 수하들은 법대로 해야 한다는 말보다 사법권력이나 검찰권력의 절제된 행사를 더 강조한다. 그들은 사법권력이 스스로 알아서 기었든, 외압 때문에 피동적으로 움직였든 행정권력의 눈치를 보고 통치행위라는 것을 건드리지 못했던 시절의 추억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런 추억이 잠재의식화된 데다가 그들이 처한 형편이 또 다급하기 때문에 사법권력을 길들이려는 움직임을 멈추지 못한다.

   법집행의 절제라는 말은 법대로 하지 말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법에 어긋나지만 '봐달라,' '눈 감아 달라'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봐준다와 눈감아준다는 서로 반대되는 표현이지만 같은 뜻으로 읽힌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법집행을 묘하게도 은유하는 언어사용이라 할 수 있다. 여하간 세간에서는 절제된 법집행의 요구를 집권자의 편에 대해서는 법집행을 자제하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 대세인 것 같다. 이른바 생계형 잡범들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독려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근자에 사법부나 검찰에서 요직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비교적 고분고분하고 '절제된 법집행'이라는 구호를 복창하는 사람들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인사도 결국 미봉책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언 발에 오줌 누기로, 뒤에 발이 더 많이 시리게 되고 동상에 걸릴 수도 있다. 정권교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고분고분한 법집행자들이 권좌에서 내려온 옛 상전에게 변함없이 법집행을 절제할 거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통치자와 그 주변에 대한 사법심사의 절제를 호소하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법원·검찰의 요직에 앉히는 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되는지 사법심사의 관문인 검찰을 아주 제도적으로 무력화하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이 통치권력에 대한 사법심사의 확대를 압박하는 시대조류를 거스르기는 역부족일 것이다.

   전임자의 큰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수준의 통치행위를 하는 데 머물고 급변하는 통치기준을 읽지 못하는 대통령들, 그보다 더 심하게는 전임자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내로남불 전략'으로 버티려 하거나 너도 그랬다고 우기는 '걸고넘어지기 전략', '물귀신작전'으로 국면을 전환하려는 대통령들이 얼마나 더 비운을 겪어야 새로운 통치질서가 정착될 수 있을까.

   국법질서, 생활질서가 흐리멍덩하던 지난 세월의 생활상을 반영하던 말들이 많다. "털어서 먼지 안 날 사람 없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호박 같은 세상에 둥글둥글 살자"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등등이 그것이다. 법집행이 권력자를 피해 다니던 '좋은 게 좋고 둥글둥글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위정자들이 버리지 못하면 봉변을 당하는 세상이 되었다. 위정자들은 그런 이치를 심각하게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연못가의 풀들이 봄날의 꿈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뜰에 떨어지는 오동잎은 이미 가을소식을 전한다. 가을이 된 줄도 모르고 봄날의 단꿈 속을 헤매는 리더십은 과도기의 희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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